[글 싣는 순서
① 인구절벽 위기 고성 협동조합으로 숨통 틔워야
② 엄마·아빠가 살려낸 ‘우리’ 꿈동산유치원
③ 더 나은 세상을 위한 협력과 변화, 위즈온협동조합
④ 가지 않은 길을 여는 청년들, 글로벌제주문화협동조합
⑤ 지역민이 나서면 지역의 가치가 커진다
고성은 인구 5만 명 선 붕괴를 눈앞에 두고 있다. 인구감소와 저출산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악순환을 불러온다. 줄어드는 인구는 지역경제의 기반까지 약화 시킨다. 인구절벽, 지역소멸 위험지역 중 고성은 늘 가장 앞에 꼽힌다.
고성군은 연간 출생아동이 200명 미만으로, 아이가 귀한 지역이다. 면 지역에 아이가 한 명 태어나면 동네가 떠들썩하고, 군 공식밴드에 축하메시지가 올라올 정도다. 동시에 노인 인구는 전체 인구의 28%가 넘는 초고령사회다.
1면 1개교 유지에 따라 각 면에 하나씩의 초등학교는 존치되고 있으나 군내 학교들은 거점학교도 예외 없이 소규모화에 가속도가 붙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바꿀 묘책이 시급하다.
지역의 소규모화에 대응하기 위해 여러 가지 시책들이 추진 중이다. 그러나 ‘고성 살리기’는 행정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당연하고 막연한 이야기지만, 군민들의 힘이 모여야 한다. “고성을 살리자”고 외치기만 한다고 해서 방법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구체적인 대안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 중 하나가 ‘협동조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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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기업인 정동유업영농조합법인의 치즈만들기 체험 모습 |
ⓒ 고성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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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활과 사업의 개선을 위한 협력조직, 협동조합
국어사전에서 협동조합을 검색하면 ‘경제적으로 약소한 처지에 있는 소비자, 농·어민, 중소기업자 등이 각자의 생활이나 사업의 개선을 위하여 만든 협력 조직’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포털사이트의 지식백과 등에서는 ‘같은 목적을 가지고 모인 조합원들이 물자 등의 구매·생산·판매·소비 등의 일부 또는 전부를 협동으로 영위하는 조직단체’라고 돼있다.
협동조합은 사업 목적을 영리에 두지 않는다. 조합원 간 상호부조가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 또한 조합원의 가입이나 탈퇴가 자유롭고, 조합원은 출자액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한 명이 한 표의 평등한 의결권을 갖는다. 잉여금을 조합원에게 분배하는데, 이 경우 출자액과 상관없이 조합이 운영하는 사업의 이용 분량에 따라 분배하게 된다.
이는 협동조합이 자본으로 구성된 단체나 사업체가 아니라 민주적 운영을 통한 인적 구성체이기 때문이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으므로 조합은 실비주의 운영을 원칙으로 한다.
협동조합은 생각보다 다양한 분야에 구성돼있다. 세계 최대 통신사인 AP통신(Associated Press)는 비영리 법인으로, 1848년 뉴욕 6개 신문사가 설립한 협동조합이다. 세계 최고 명문구단 FC바르셀로나는 10만 명이 넘는 조합원이 내는 후원금으로 운영되는 협동조합이다. 레알마드리드 역시 마찬가지다.
과일주스로 잘 알려진 선키스트는 미국 캘리포니아와 애리조나의 오렌지 재배농민 6천여 명과 8개 협동조합이 불합리한 유통체계를 개선하고자 하는 데 뜻을 모아 설립했다.
국내에도 잘 알려진 협동조합들이 많다. 흔히 금융기관으로 알고 있는 지역단위 농협과 축협, 수협, 산림조합, 새마을금고 등은 사실 농수축산인들이 조합원으로 참여하는 협동조합이다. 서울우유(서울우유협동조합), 부산우유(부산경남우유협동조합)도 협동조합에서 생산된다.
부천 FC 1995, 서울 유나이티드 FC, 청주 FC 등 국내 축구클럽 역시 조합원들이 일정금액을 부담하는 협동조합으로 운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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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협동조합은 영국 로치데일의 노동자들이 자본가들의 횡포에 맞서 발족한 로치데일공정선구자조합이 시초다. 사진은 조합으로 쓰인 로치데일박물관 |
ⓒ 고성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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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치데일공정선구자조합의 발족 초창기 ‘선구자’들의 모습 |
ⓒ 고성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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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0년을 이어온 해외 협동조합의 역사
협동조합은 19세기 중반 영국의 로치데일에서 시작됐다. 1844년 발족한 로치데일공정선구자조합(Rochidale Society of Equitable Pioneers)은 근대 협동조합의 효시다.
당시 영국은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가 빠르게 발달하던 시기다. 노동자들은 자본가들의 횡포로 저임금은 물론 질 떨어지는 생필품을 비싼 가격으로 사며 이중고에 시달려야 했다. 견디다 못한 직물공장 노동자 28명은 그해 12월 밀가루나 버터 등 식료품을 제가격에 공동구입하기 위한 점포를 만들고자 1년에 1파운드씩 출자금을 모아 로치데일공정선구자조합을 만들게 됐다.
로치데일공정선구자조합은 성공을 거두면서 급속도로 성장했다. 이는 영국의 협동조합이 확대되는 발판이 됐다.
협동조합이 확산되면서 도매공급업자들은 이윤이 줄었고 이에 업자들이 협동조합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이에 맞서 지역협동조합들은 1863년 도매업협동조합(CWS·Cooperative Wholesale Society)을 창립하기에 이르렀다. 생산과 공급, 유통까지 점차 영역을 넓힌 CWS는 필요한 물품을 저렴하게 구입해 지역협동조합에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것이 목표였다. 1872년에는 코-오퍼러티브 은행(The Co-operative Bank)를 설립하면서 금융사업까지 영역을 확장했다.
로치데일의 이런 성공적 운영은 유럽을 중심으로 전 세계에 협동조합을 확산하는 계기가 됐다. 1937년에는 국제협동조합연맹대회에서 협동조합원칙을 공식적으로 정했다. 1955년에는 식료품의 시장점유율이 20%로 높아졌다.
이윤을 목적으로 문어발식으로 사업을 확장하던 기업들에 맞선 협동조합을 소비자들은 반겼다. 로치데일의 수익금은 교육과 자선사업에 기부하고, 투자한 자본에는 고정적 이자를 지급했다. 또한 사업의 이익금은 구매비율에 따라 조합원들에게 분배했다. 이는 지금까지 소비자협동조합의 기본구조가 되고 있다.
로치데일이 노동자들의 생활 개선을 위한 소비조합이었다면 10여 년 후 유럽의 다른 국가에서는 조금 달랐다. 당시 미처 자본주의가 확립되지 않았던 프랑스는 산업혁명을 위해 중소 수공업을 근대적 공장공업으로 바꾸기 위해 생산조합을 설립했다. 독일에서는 도시산업, 농촌공업의 생산력 향상을 위해 당장 시급한 것이 고리채라 보고, 이를 추방하는 한편 이자율이 낮은 자금을 공급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에 독일에서는 신용조합을 결성하면서 협동조합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 계몽과 독립운동에 앞장선 우리나라의 협동조합
우리나라에서 협동조합이 설립된 것은 유럽보다 100여 년 후의 일이다. 1910년대 금융조합, 1920년대 산업조합이 협동조합 형태이기는 했으나 이는 조선총독부가 식민통치를 위한 경제적 보조기관으로 설립한 것이라 민간이 주도적으로 설립한 협동조합이라고 볼 수 없다는 시각이 많다.
국권 피탈 후 조선에는 일본 상품들이 밀려들어왔고, 민족산업들은 고난을 겪게 됐다. 조선의 기업들은 물건을 팔지 못해 문을 닫거나 울며 겨자먹기로 비싼 이자를 감당하며 일본인의 자본을 빌려야 했다. 결국 조선의 경제는 일본에 잠식당할 처지가 됐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조선의 지식인들은 조선물산장려회를 조직하고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시작했다. 조선인이 생산한 조선의 상품을 사용해 우리 민족의 경제적 자립을 이루자는 운동이었다. 고성 출신 독립운동가이자 지금의 서울 북촌 한옥마을을 만든 조선 최초의 디벨로퍼 정세권 선생은 서울 낙원동의 자택 일부층을 조선물산장려회에 제공하며 중심적 역할을 했다.
조선물산장려회는 우리나라 최초로 시작된 민간 협동조합운동으로 평가받는다. 1920년대 한반도에서는 조선물산장려운동 외에도 외화배척운동·납세거부운동·소작쟁의·민립대학설립운동 등 다양한 민간협동조합운동이 일어났다. 전진한이 이끌었던 협동조합운동사, 이성환이 주도한 조선농민사, 홍병선이 중심이었던 협동조합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결성돼 활동했다. 이들은 계와 향약 등 전통적 협동조직을 바탕으로 조선인 농민, 노동자, 지식인을 비롯한 대중이 자방적으로 소비조합, 신용조합을 조직한 것은 물론 경제적 자력 갱생과 민중계몽운동을 벌이며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독립운동에도 앞장섰다.
유럽과 한반도의 협동조합 출발배경은 애초에 다른 목적을 띠고 있다. 조선의 협동조합들은 다른 나라의 협동조합과는 달리 정치적 색채가 강했다. 일제의 식민지배 때문이다. 또한 이로 인해 일제의 탄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협동조합은 10여 년 간 이어지다가 1930년대 초 조선총독부의 농촌진흥운동이 시작되던 시기 사라졌다. 자연소멸된 조합도 있지만 강제해산된 곳도 적지 않다.
광복 후 우리나라의 협동조합운동은 다시 시작됐다. 정치적·사회적 혼란이 거듭되고 6.25 전쟁까지 치르면서 재건에 어려움을 겪던 협동조합은 1950년대 후반에서야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1950년대 남한에는 약 8천700여 개의 협동조합이 있었다. 전국의 리와 동에도 협동조합이 있었다. 1957년 국내에도 협동조합법이 만들어졌고 협동조합은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5.16 군사정변 후 각종 법률들이 위헌적으로 정지되고 이 시기 협동조합도 암흑기를 맞았다.
1960년대 들어 농업협동조합과 농업은행이 통합해 농협으로 재발족했다. 일제강점기 설립된 어업조합은 수산업협동조합이 됐고, 신용협동조합도 전국에서 설립되기 시작했다.
국내 대표적인 협동조합인 농협과 수협, 신협, 새마을금고연합회는 국제협동조합연맹 회원으로 가입돼있다. 이들의 중앙조직 산하에 있는 단위조합은 6천 개가 넘고, 개인조합원은 2천만 명에 가깝다. 이 외에도 1970년대를 지나오면서 소비자생활협동조합, 산림조합, 엽연초생산협동조합 및 중소기업협동조합 등이 발족됐다.
# 협동조합, 사회적 협동조합과 차이
사회적 협동조합은 지역민의 권익과 복리증진, 취약계층에 사회적 서비스나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이 목적이다. 비영리 목적으로 설립된 사회적 협동조합은 사업의 40% 이상을 공익사업으로 추진해야 하고, 관계기관의 인가가 필요하다.
일반 협동조합과 가장 큰 차이는 조합원의 배당이다. 일반 협동조합이 이익금을 조합원에게 배당금으로 되돌려주는 반면 사회적 협동조합은 조합원 배당이 금지되고, 잉여금의 30%를 적립해야 한다. 또한 결산일로부터 3개월 이내에 경영공시자료를 연합회 홈페이지에 게재해야 하는 것도 차이점이다.
사회적 협동조합은 얼핏 사회적 기업과 비슷해 보이지만 이와 다르다. 사회적 기업 역시 취약계층에 사회서비스, 일자리 등을 제공하고 지역사회에 공헌을 통해 지역민의 삶의 질을 향상한다는 사회적 목적을 갖고 있으나 재화 및 서비스의 생산과 판매 등 영업활동을 할 수 있다는 점은 아주 큰 차이다.
사회적 기업은 협동조합이나 주식회사, 사단법인 등 법인의 한 형태가 아니라 이미 설립, 운영 중인 법인이 일정 요건을 갖추면 고용노동부, 지자체로부터 자격을 받게 된다. 그러니 협동자헙기본법 상의 영리법인인 일반협동조합, 협동조합기본법 상의 비영리 법인인 사회적 협동조합도 자격을 갖춘다면 사회적 기업으로 운영할 수 있다. 협동조합이 사회적 기업으로 완전히 형태나 방식, 자격이 변경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협동조합 법인자격은 그대로 유지한 채 사회적 기업의 자격을 부여받는 것이다. 사회적기업 타이틀을 얻게 되면 해당 기업은 별도 요건을 갖춰 심사 후 일자리 창출사업이나 사업개발비 등의 자금도 지원받을 수 있다.
협동조합은 출자금 액수와 상관없이 각 조합원이 1인 1표를 행사할 수 있다. 이는 곧 민주적 기업 운영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일반 기업과는 달리 조합의 이익이 아니라 조합원의 이익을 우선으로 하기 때문에 적자가 나도 조합원은 이익을 얻을 수 있다. 이 때문에 협동조합은 ‘가장 민주적인 기업체제’라고도 불린다.
협동조합의 설립분야는 다양하다. 해외에서 출발한 경제 분야 외에도 교육, 복지 등 필요한 모든 분야에서 5명 이상의 조합원만 확보된다면 협동조합을 설립할 수 있다. 조합원이 중심인 협동조합은 민주적 운영체제로, 사회적 목소리를 내는 것에도 일반 기업보다 용이할 수 있다. 조합원 즉 지역민이 주체가 된 사업 운영과 동시에 이익금 배당까지 ‘민’이 우선이다. 이 때문에 작은 지역에서 협동조합은 오히려 기업보다 큰 득이 될 수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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